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꽤 큰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제 머릿속에 남은 건 화려한 장면들의 잔상뿐이었습니다. 첩보물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서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류승완 감독과 블록버스터 첩보물의 기대
류승완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이 감독이 왜 특별한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짝패, 부당거래,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세 편은 액션의 타격감과 말맛, 그리고 폭력적인 쾌감이 탁월하게 조화를 이뤘습니다. 군함도나 모가디슈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선 세 편이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휴민트는 그 계보에서 특히 베를린의 냄새가 진하게 풍깁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국정원 조 과장, 북한 국가보위성 박건, 그리고 북한 식당 종업원 최선화가 인신매매 사건을 둘러싸고 얽히는 구도는, 냉전 구도의 도시 첩보물이라는 기대를 충분히 자극합니다. 여기서 국가보위성이란 북한의 비밀경찰 및 정보기관으로, 반체제 인사 감시와 해외 공작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입니다. 이런 설정만 놓고 보면 꽤 탄탄한 첩보 스릴러의 뼈대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영화가 그 뼈대를 제대로 살 붙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첩보물의 핵심 재미는 휴민트(HUMINT)에 있습니다. 여기서 휴민트란 인간 정보원을 활용해 적의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인적 정보 활동을 의미하는데, 제임스 본드 시리즈나 틴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같은 작품들이 이를 극적 긴장의 원천으로 삼는 방식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첩보전은 전체의 20%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40%는 멜로, 40%는 액션입니다.
액션 스타일과 서사 부재의 충돌
제가 직접 극장에서 확인한 바로는, 이 영화의 진짜 강점은 액션 시퀀스에 있습니다. 조인성의 전투 연기는 근접 타격전과 총기 액션을 넘나들며 압도적인 밀도를 자랑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를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 시리즈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극장에서 보면 중반부의 대형 액션 시퀀스는 확실히 몰입감이 있었습니다.
비주얼 측면에서도 류승완 감독 특유의 미장센(mise-en-scène)이 돋보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속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세트, 배우의 위치 등을 연출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어두운 골목과 실내 조명의 대비, 그리고 류승완 감독이 즐겨 쓰는 스플릿 포커스 디옵터(split-focus diopter) 기법도 등장합니다. 스플릿 포커스 디옵터란 렌즈 앞에 절반짜리 클로즈업 렌즈를 덧대어, 전경과 후경을 동시에 선명하게 찍는 촬영 기법입니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즐겨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고, 류승완 감독도 오래전부터 이를 애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각적 완성도가 서사의 공백을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가장 답답하게 느낀 지점은 인물들의 행동 동기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저 인물이 저 선택을 하지?'라는 의문이 반복되다 보면 아무리 화려한 액션도 공중에 뜨게 됩니다. 개연성(plausibility)이란 이야기 안에서 사건과 인물의 행동이 논리적으로 납득 가능한 정도를 의미하는데, 이 부분이 무너지면 관객의 몰입은 순식간에 깨집니다.
특히 박정민이 연기하는 박건 캐릭터가 아쉬웠습니다. 박정민은 분명 이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 역대 최고 난이도의 액션을 소화해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민하고 친숙한 배우 이미지가 인물이 풍겨야 할 신비감과 위험함을 희석시킵니다. 박건이 보여야 할 자리에 배우 박정민이 보이는 이 역설이야말로, 이 영화 멜로 라인이 작동하지 않는 핵심 원인이라고 봅니다.
이 영화에서 서사와 액션 사이의 균형 실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인물 행동의 개연성 부족: 주요 선택들이 납득되지 않아 몰입이 반복적으로 끊김
- 멜로 라인의 감정 전달 실패: 박건과 최선화의 관계가 설득력 있게 쌓이지 않음
-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진부함: 무릎 베고 죽음을 맞는 장면, 등을 맞대고 총을 겨누는 장면 등이 2020년대 영화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의 진부함을 드러냄
홍콩 누아르 오마주의 명암과 전망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내내 기시감(旣視感)에 시달렸습니다. 기시감이란 전에 본 적 없는 것을 마치 본 것처럼 느끼는 심리 현상인데, 영화적 맥락에서는 다른 작품의 문법이나 장면이 강하게 연상될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 임영동의 용호풍운, 두기봉의 엑사일, 진목승 감독의 천장지구 등, 80~90년대 홍콩 누아르의 쌍남 구조와 감성이 전면에 깔려 있습니다.
홍콩 누아르란 1980~90년대 홍콩 영화 특유의 장르로, 의리와 배신, 남성 간의 동료애, 총격전과 멜로를 뒤섞은 감성적 범죄 영화 양식을 말합니다. 이 장르를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분명 반가울 수 있습니다. 저처럼 그 문법을 알고 있는 세대에게는 일종의 반가움이 있지만, 동시에 '이걸 지금 이렇게 써도 되나?'라는 민망함도 솔직히 들었습니다. 특히 후반부의 감정 과잉 장면들은 류승완 감독이 의도한 오마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어설픈 복각처럼 읽혔습니다.
영화 장르 연구자들은 오마주(hommage)와 모방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재해석의 층위'를 언급합니다. 오마주란 원작의 문법을 의식적으로 인용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맥락을 덧입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영화의 후반부는 재해석보다 복각에 더 가까웠다는 게 솔직한 평가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관객 조사 분석에 따르면, 최근 국내 20~30대 관객은 장르적 완성도와 서사의 유기성을 선택 기준 상위권에 놓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https://www.kofic.or.kr)). 이 영화가 그 세대를 얼마나 끌어당길 수 있을지는 회의적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류승완 감독이 하고 싶은 것을 다 담은 작품입니다. 그 진심은 화면 곳곳에서 읽힙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이 한국에 류승완 외에 누가 있겠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과 관객이 보고 싶은 것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배우들의 티켓 파워와 액션 스타일에 기댄 점은 분명히 아쉽습니다. 실제로 글로벌 OTT 흥행 데이터를 보면, 액션 장르에서도 서사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수록 장기 흥행을 이어가는 경향이 뚜렷합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https://www.kocca.kr)).
조인성과 박정민, 신세경의 고군분투가 이 영화를 그나마 볼 만하게 만들어주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스타일은 있고 서사는 없는 영화, 휴민트는 그 안타까운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액션 시퀀스 자체를 즐기는 분이라면 극장에서 볼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탄탄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간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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