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광주에 살지는 않지만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역사'로 배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평범한 택시운전사가 10만 원짜리 손님을 태우러 갔다가 역사의 한복판에 선다는 이야기. 그것이 실화라는 사실이 저를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배우긴 하지만 공부할 때와는 다르게 이러한 사람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어떤 세상이 왔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최근 5월 18일이 지나 여러 가지 사태에 대해서 다시 한번 보게 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꺼낸 사람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기록한 비디오테이프가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까. 저도 처음에는 당연히 국내 언론인이 찍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찾아보니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 국내 언론은 계엄 당국의 언론 통제(press control) 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언론 통제란 국가 권력이 보도 내용을 검열하거나 아예 취재 자체를 막는 행위를 말합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른 지역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중학생이던 시절, 선생님이 교실 문을 잠그고 몰래 이야기를 전해주셨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들을 때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공개적으로 말할 수조차 없는 진실이었으니까요.
그 진실을 카메라에 담은 사람은 독일 공영방송 ARD 소속의 외신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였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광주로 들어가 학살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고, 그 영상은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이후 이 영상은 VHS(비디오 홈 시스템) 테이프로 복사되어 사람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돌았습니다. VHS란 1970~80년대 전 세계에서 표준으로 사용된 가정용 비디오 녹화 방식으로, 당시에는 이 테이프가 진실을 전달하는 유일한 매체였습니다. 흐릿한 화질이었음에도 그것을 본 사람들은 깊은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이 영상의 일부를 본 적이 있는데, 화질이 낡았어도 그 안에 담긴 공포는 조금도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변화, 김만섭이라는 인물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김만섭은 영웅이 아닙니다. 적당히 속물적이고, 월세 걱정에 딸 신발 걱정이나 하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배우 송강호가 이런 인물을 맡는다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는데, 저는 그게 바로 이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만섭이 광주로 향한 이유는 순수하게 10만 원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영화는 1인칭 시점 서술(first-person narrative)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1인칭 시점 서술이란 주인공의 눈과 감정을 통해 사건을 경험하게 만드는 구성 방식으로, 관객이 직접 광주의 거리를 걷는 듯한 감각을 줍니다. 처음에는 평화롭고 따뜻했던 광주가 점점 혼란과 폭력으로 물들어 가는 장면들을 만섭의 시선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제가 광주에 살면서 느끼는 건, 이 도시 사람들은 그 기억을 단순히 '슬픔'으로만 품고 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부심이 섞여 있습니다. 항쟁 기간 동안 도둑 하나 없을 만큼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고 서로를 돌본 공동체. 그 모습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고, 저는 그 장면들을 볼 때마다 뭔가 찡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유턴, 그리고 주먹밥의 의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만섭의 유턴입니다. 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하다가 결국 광주로 되돌아가는 그 장면.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섭이 유턴을 결심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주먹밥입니다. 이 주먹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5·18 민주화운동에서 주먹밥은 시민 자치(civic autonomy)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시민 자치란 외부의 통제 없이 주민 스스로 공동체를 운영하고 서로를 돌보는 힘을 뜻합니다. 당시 광주는 계엄군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시민들이 음식을 나누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물자를 자발적으로 분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5·18이 외부 세력의 사주가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인 저항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만섭이 유턴한 뒤의 행동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 딸에게 사주려던 신발을 희생된 대학생에게 신겨준 장면
- 아끼던 택시를 총알받이로 내준 장면
- 필름통 끈을 야무지게 매듭지어 힌츠페터에게 건네는 장면
이 세 가지 행동은 모두 만섭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이 사람이 그냥 택시기사가 아니구나"라는 생각보다 "나라면 저럴 수 있었을까"를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UNESCO Memory of the World란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 유산을 보존하고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지정하는 제도입니다. 5·18 관련 기록물이 이 목록에 오른 것은 광주의 이야기가 한국만의 것이 아닌 인류 보편의 민주주의 역사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https://www.unesco.or.kr)).
광주의 고립과 1987년 6월 항쟁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머릿속에 남은 장면이 있습니다. 도청 광장으로 향하는 행렬 속에서 외국인 기자를 발견한 광주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반기는 장면입니다. 그 눈물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습니다. 제발 이 진실을 밖에 알려달라는 간절함이었을 테니까요.
당시 광주 시민들이 느꼈을 고립감은 단순한 물리적 고립이 아니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정보 봉쇄(information blackout) 상태에 놓였습니다. 정보 봉쇄란 특정 지역 또는 집단에 대한 모든 외부 정보 유입과 유출을 차단하는 조치를 말합니다. 광주 바깥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고, 광주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는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이 고립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았습니다. 5·18 이후 몇 년간 다른 지역의 청년들은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싸우지 못해서 광주가 그런 희생을 치렀다는 자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결국 1987년 6월 항쟁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에너지였습니다. 6월 항쟁 당시 광주와 전남북 지역의 시위 참여 규모가 한때 현저히 낮았던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한 번 불을 질렀다가 처참하게 진압당한 곳에서 다시 일어서는 데는 '이번에는 다르다'는 확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전국이 함께한다는 것이 확실해지고 나서야 광주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역사라는 게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실감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재단에 따르면 5·18로 공식 인정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만 해도 600명이 넘으며, 부상자와 구금자까지 포함하면 피해자 수는 훨씬 많습니다([출처: 5·18민주화운동기념재단](https://www.518.org)). 이 숫자 뒤에 각각의 이름과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를 폭동이나 사태로 기억하는 분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과거의 잘못된 주입식 교육과 정보 통제가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록이 있고, 증언이 있고, 유네스코가 인정한 자료가 있습니다. 광주에 살면서 이 역사를 교과서로 배우고, 기념관에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작지 않은 일입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5·18이 멀게 느껴진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만섭의 눈으로 광주를 따라가다 보면, 그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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