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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 수가 없다 (고용불안, 가장의무게, 블랙코미디)

by movienote 2026. 5. 23.

솔직히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작품인데, 제가 그 이유를 뼛속으로 이해한 건 스크린이 꺼지고 나서였습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50대 가장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저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가 없다

 

고용불안 시대, 유만수의 몰락이 남의 일이 아닌 이유

당신은 혹시 "이 자리가 영원할 것 같다"고 믿었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영화의 주인공 유만수는 그런 사람입니다. 평생을 바친 회사, 대출이 3억이 넘지만 직접 일궈낸 집, 바베큐 연기가 올라가는 마당. 그 풍경이 얼마나 단단해 보였는지, 해고 통보가 오기 직전까지 관객은 그 행복감에 함께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높이만큼 추락은 잔인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통장 잔고가 아니라 자아감입니다. 매일 밤 "어쩔 수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 시절, 그 말이 위로인지 변명인지 구분이 안 됐습니다. 유만수가 면접장에서 자신의 가장 큰 단점으로 "싫은데요라고 말 못 하는 성격"을 꼽는 장면에서, 저는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영화는 유만수의 해고를 미국계 사모펀드(PEF)의 인수 후 구조조정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사모펀드(PEF, Private Equity Fund)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한 뒤 구조 개편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효율화를 명분으로 사람을 정리하는 구조의 핵심 주체입니다. 경력이 길다는 이유가 오히려 해고의 빌미가 되는 이 역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직장인들이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현실입니다.

실제로 고용 불안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국내 비자발적 이직자 수는 최근 수년간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중장년층의 재취업 기간은 청년층에 비해 현저히 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유만수가 허위 구직 광고를 내서 경쟁자들의 이력서를 받아 등급을 매기는 장면은 그냥 블랙 코미디가 아닙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실소가 나오면서도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그만큼 절박함이 진짜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유만수가 제거 대상으로 삼는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 이 세 사람 모두 사실 유만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들 어딘가 몰락해가는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을 향한 유만수의 감정은 살의와 연민 사이를 위태롭게 오갑니다. 이 지점이 영화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와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순간입니다.

영화에서 유만수가 재취업을 노리는 회사 '문재'의 특수지 라인에 주목하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특수지(特殊紙)란 일반 인쇄용지와 달리 방수, 내열, 항균 등 특정 기능을 갖도록 제조된 고부가가치 종이를 말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주인공의 직업과 업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야기가 현실의 어느 공장 바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것 같은 밀도를 만들어냅니다.

 

이병헌과 손예진, 그리고 미장센이 말하는 것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면, 당신도 저와 같은 경험을 한 겁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유만수는 흔히 말하는 알파 남성(alpha male)의 외피를 두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파 남성이란 집단 내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며 강인함과 경제력을 과시하는 남성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병헌은 그 알파 남성이 내부에서 얼마나 취약하게 무너지는지를, 단 한 번도 과장 없이 보여줍니다. 공감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면서도 그 동기만큼은 이해 가능하게 유지하는 것, 이게 얼마나 어려운 연기인지 제가 영화를 여러 편 보면서 느낀 바로는 정말 드문 경지입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영화의 정서적 중심입니다. 해고 소식에 침착하게 반응하고, 집을 팔아 전세로 가자는 현실적인 제안을 꺼내는 그 장면에서 미리는 약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가정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제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렸고, 그래서인지 더 먹먹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미장센(mise-en-scène)은 이 영화에서도 핵심적인 서사 도구입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앞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공간,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 등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을 말합니다. 영화 속 새 남자의 저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중년 남성의 로망과 고립, 과시욕이 건축 공간 자체로 응축되어 있고, 그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은 대사 없이도 많은 것을 말합니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이 연기하는 조연들 역시 각자 기괴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영화의 촘촘한 결을 완성합니다. 특히 구범모 내외와의 몸싸움 장면, 고시조와의 예상치 못한 대화, 최선출과의 음주 장면은 세 장면 모두 방향이 다르면서도 각각 강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영화가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이겁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고백인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위선적인 주문인가. AI와 자동화로 인한 구조적 실업이 현실이 되어가는 지금, 이 질문이 화면 밖으로 걸어 나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로 OECD는 자동화로 인해 전체 일자리의 약 14%가 대체 위험에 처해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출처: OECD).

영화 속 유만수의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 후 사회에서 버려지는 이야기는, 사회가 필요할 때 역할을 주고 필요가 사라지면 내치는 방식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 시대적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용은 충성의 대가가 아닌, 자본의 필요에 의해 주어졌다 회수되는 것
  •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폭력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 AI와 자동화는 유만수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빠르게 만들어낼 것이다

마지막 장면, 불이 꺼져가는 자동화 공장 안에서 유만수가 쾌재를 부르는 모습은 슬픕니다. 그가 원했던 자리를 얻었지만 그 자리 자체가 이미 저물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비수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류의 결말이 오래 남는 건, 우리 모두가 그 공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한 번 보고 끝낼 영화가 아닙니다. 극장에서 보고 나왔을 때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덮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면,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제대로 꽂힌 겁니다. 아직 개봉 중이라면 꼭 극장에서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스크린의 크기가 그 먹먹함을 배가시킵니다.


참고: https://youtu.be/77Yes279dV8